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지 아니하리라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18:1-11)
유다가 군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의 하속들까지 몰고 들이닥치자 예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들은 손대지 말고 너희 목적인 나만 잡아가라고 하신다. 세상에 나와 살면서 진리의 길 또는 그 비슷한 길이라도 가고자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고단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그릇된 믿음과 생각들 틈바귀에서 참된 진리를 알고 지킨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은 큰 힘이 되지만, 안다고 해서 남보다 편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일흔두 살의 노인이 돼서 당대 젊은이를 선동하고 신을 경멸하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 시류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에게 영혼의 불멸을 말하며 유언을 남긴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는 죽고 너희는 살 것이다. 어느 것이 나은 운명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시대가 변했고 이성, 과학문명이 발달한다고는 해도 진리, 종교의 영역에서 만큼은 세상의 욕심이 진리를 억누르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슴에 탐심 가득한 종교인들이 종교를 빙자해 사람들의 믿음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천국 아편을 파는 것도 그렇다.
바울은 이를 두고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지혜, 지식,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과 사랑, 신의 성품을 느끼게 하신 분,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신비)의 힘]을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3-4)고 일렀다.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당신 스스로 형장으로 끌려가고 제자들은 피신케 했다는 말이 아니다. 육신의 삶은 시간문제일 뿐이며 누구나 결국 죽는다. 어떤 삶을 살다가 그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보여주셨다.
“내가 저희(제자)와 함께 있을 때(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2-15)라고 했던 것처럼 육체적 죽음의 문턱에서도 진리의 삶을 살아내셨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므로, 따라서 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 당신을 잡으러온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베어버리자 그에게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혹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하셨다. 진리의 길을 간다고 해도 세상이 이를 어여삐 여겨 걸음마다 꽃을 뿌려줄 것으로 안다면 큰 오산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께 하겠느나”(전7:16)고 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되 감당할 만큼 가는 것이야말로 지혜이다.
그것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고 했다. 자기 안에 천국(기쁨, 감사, 온유, 겸손, 자족)이 없는 말뿐인 천국을 전파하는 것은 거짓이다. 천국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바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그저 조심스럽게 살아갈 뿐이다.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해 신의 성품으로 살 수 있게 하든지 최소한 그런 삶을 소망하도록 하는 것인데, 우선 제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다 헛된 놀음, 자기기만일 뿐이다. 돌아보고 반성하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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