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이끄심과 시험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1-2)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신 그 때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을 하시고 주리셨다. 그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이에 의해서 시험 받는 곳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갔다고 한다. 예수의 시험 사건은 예수 자신이 영적 존재인 무아(無我)와 연합된 존재인 것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다. 육체의 입장에서는 영적 존재가 타인이 되고 영적 존재의 입장에서는 육체가 타인이 되는 갈등구조의 존재인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시험이다.
이러한 상황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했다. 신앙에 있어 배움의 단계가 아닌 완성의 단계에서는 육체와 영적 존재는 나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은 영의 밖이고 영은 육의 안이기 때문이다. 밖은 안이 있으므로 존재하고 안은 밖이 있으므로 존재한다. 육체 된 사람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영과 육을 구분해서 살아가려는 발버둥이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육체와 분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죽음)에 이르게 되면 육은 소멸되고 영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배워야 한다. 육체는 육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영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형상의 문제가 아니고 육체의 형상 속에 실제 존재인 '영'을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다. 영(하나님의 정신)을 안다면 사람이라 하지만, 육체의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간다면 성경에서는 그것을 짐승이라 한다.
예수님의 시험
예수께서는 타인에게 시험 받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단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끌려갔다. 또한 여기에서 시험은 「페이라조」(πειραζω)이다. 얼핏 보면 '유혹 받다'(tempted) 같지만 실제로는 '자질 검사'(test)이며 더 나아가 '증명'(입증, prove)한 것이다.
유혹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고통에 빠져드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약1:13-15)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은 사건을 살펴보면 다른 이에 의해서 시험 받는 곳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갔다고 한다. 분명히 성령이 이끌었다고 돼 있는데, 성령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 이라 했다. 여기에서 말이란 말(언어)이 아니다. 영적 존재를 말(언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글귀에도 나타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와 같은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말씀화시켜서 설명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렸다는 것은 자신의 속 존재에 의해서 육체를 광야로 끌고 가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앙, 자신의 진리가 지식적인 것인지 존재적인 것인지를 확인하고 검증받기 위한 작업이었다.
우리는 지식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확신하고 있으면 스스로 그렇게 된 줄로 막연히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지식적 신앙이 자기가 원하는 일정한 요건의 환경과 차이가 날 때에서야 신앙을 돌아본다. 그러나 예수처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이 육체를 위한 존재인지 영을 위한 육체로 살아가는지 모호한 상황이 닥치기 이전에 미리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본능적 욕심을 다 끌어올려 자신(육+영)이 육체에 치우친 삶을 살아가는 데로 기울지 않았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욕심은 절대적 욕심을 말한다. 세상적 개념의 상대적 욕심은 상대적으로 작을수록 순수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순수해서 순수한 것이 아니다. 타인과 관계없이 자신의 절대적 욕심을 진리에 의지해 통과한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이다. 예수님의 시험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를 거스르지 않고 협력하는 상태가 된 존재를 자기 자신이 검증한 것이다. 영이 육의 주인으로서 육을 섬기며 육을 통해 영의 일을 행하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시험(능동)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만난다고 했다. 그 시험은 상대방은 느낄 수 없이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남을 주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읽는 우리는 스스로 시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 시험을 통해 증명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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