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11) - 박승현 목사님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11:9-23)
예수님은, 9절에서는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시고 14절에서는 죽었다고 말씀하시며, 나사로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는 말씀도 보인다. 본문 이후에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문자가 전하는 내용으로만 보면 예수님 당신의 말씀에 스스로 못질을 하시는 것인데,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목숨)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하셨다.
이 말은 “몸은 살려도 영혼(목숨)을 살리지 못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천국에 살게 하시는 자를 경외하라”고 달리 표현될 수 있다. 나사로라는, 죽어 있는 육체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근본 뜻은 아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사람의 욕심을 채워줄 표적을 구하지만 선하고 깨끗함을 원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그릇 닦기를 원할 뿐이다.
또한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나사로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 존재의 말씀 상태를 생명, 빛(요1:1-4)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상태와 하나님의 존재가 자기 내면의 빛을 밝혀 주지 못하면 잠자는 자요,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내면에 빛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삶을 식물인간의 그것과 같은 상태로 방치하기도 한다. 나사로처럼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자가 그런 자들인데, 배우되 그렇게 살 수 없거나 혹은 자기 역량 이상으로 살 수 없는 한계에 대해 무력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영적인 것은 나 몰라라 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배운 대로 살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배울 것을 타인에게 지시하고 제 배움을 드러내는 것만 족하게 여기며 살 뿐이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요11장)의 부활된 삶을 볼 수 있다. 그는 자기 달란트만큼, 할 수 있는 만큼, 기쁨과 감사가 있는 만큼만 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