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명(εντολη; 엔토레, 안에서 올리는 말씀)을 소유한 자 (요14) - 박승현 목사님
나의 계명(εντολη; 엔토레, 안에서 올리는 말씀)을 소유한 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그것이 진실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을 빙자한 다른 그 무엇 때문일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바람직한’ 사랑이다. 자신의 감정적인 만족과 충일, 허세를 위한 것이면서 어쨌든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외치신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예수님은 내 겉모습을 좋아하고 네 마음대로 나를 위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고 하신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너 아닌 다른 존재를 통해 끊임없이 속삭이는 밀어(密語), 사랑의 말씀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속삭여지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 계명을 지키는(εχω; 에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랑에 이끌리는 삶을 산 것처럼 너희가 진정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처럼 살아보라고 하신다. 세상의 사랑은 그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묶어 놓는 것이지만 하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내게 원하는 삶을 사는 것, 사랑의 대상이 자신처럼 살게 되길 소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베스도와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회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즉 말이 적으나 많으나(혹은 잘 하나 못 하나)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내가 너희보다 못한 것(지식, 돈, 명예 등)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참된, 하늘의 사랑의 정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구를 사랑한 자라면 그 누구인가가 원하는 존재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존재가 된 자는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가 원하는 존재가 된 자, 즉 나 역시 사랑하실 것이며, 더불어 예수 당신도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여 내게 당신이 나타나도록 [εμψανιξω; 엠파니조, (노골적으로) 선포하다, 알리다]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바울 사도에게 찾을 수 있는데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αποκαλυπτω; 아포칼립토,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기뻐하실 때에”(갈1:15-16)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면 갈라디아서 1장 16절처럼 덮개가 제거되어 나타나 보이게 된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삶 속의 앎이 되는 것이다. 지식의 앎은 잊혀지고 소비되는 것일 뿐이지만 삶 속의 앎은 체험이고 사랑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참조)
강림 [παρονσια; 파루시아, come back appear, 가까이 존재하는 것, 출현, 재림]
εχω; 에코, (내면에) 소유하다. /υπαρχω; (물질, 가시적으로) 소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