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예비일이라 (요19) - 박승현 목사님
이날은 예비일이라
“이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리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1-37)
예수님이 처형된 때는 예비일 목요일 오후 6시에서 금요일 같은 시간쯤이었는데, 금요일 오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에 처형된 자를 그 상태로 며칠 정도 방치하면 숨을 거두기 마련인데, 그 시체가 안식일까지 매달려 있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려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면 통증이 더하거니와 다리가 몸을 받칠 수 없어 상체가 심히 무너지면서 호흡장애가 오고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의 처형관습에 따르면 십자가형에 처한 자의 시체를 그대로 두어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예외로 한 셈이다. 유월절 같은 큰 축제일에 모일 유대인들을 자극해서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골치 아플 것이라는 빌라도의 정치적 꾐수도 작용한 탓이었을 것이다.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자들의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일찍 죽음을 맞았기에 저들이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성경적으로도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것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유월절의 양은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라 이른 성서 구절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세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목적으로만 살던 때)에서 가나안(먹고 마시는 것보다 어떻게 사랑하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때)으로 떠나게 하시려고 ‘양’(제물)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당신의 심판을 피해가도록 하신 그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심판을 통과했다는 구약 출애굽기의 말씀은 상징적 은유이지만 신약에서는 의미가 명확하다. 즉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바로보고 그분처럼 살려고 애쓰는 것이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고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문설주에 피를 묻히는 시늉이나 단순하고 요식적인 행위로 피해갈 수 없다. 모든 이에 대해 긍휼을 갖게 될 때라야 진정 심판을 훌쩍 뛰어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처럼 제물이 되어 심판 당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다. 우리의 입(마음과 삶)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긍휼의 말씀을 내고 살아간다면, 순결한 제물의 피를 몸과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