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 - 박승현 목사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하신 처음 건넨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였다.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이 마음에 있어야만 평강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를 육체적, 물리적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우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자. 예수께서 닫힌 문을 열거나 닫는 바 없이 제자들 있는 곳에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육체를 가지고 보낸 3년여의 공생애, 복음 전도의 생활을 하고 난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바로 그 장면이다.
가령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이전의 사울)에게 나타나신 정경이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내가 이 도(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교훈)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22:4-8, 행9장과 26장 참고)고 한 대목과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바울)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1:16)와 같은 부분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가르치신 교훈이 실제로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당신이 육체적 죽음을 당한 뒤에는 다른 보혜사(돕는 배필, 인도자) 즉 진리의 영을 보낸다고 하셨다. 비록 세상(탐욕의 존재들)은 저를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할 거라고도 하셨으나 마침내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은 나를 나타내리라”(요14:16-21)고 하셨으니 그대로 된 것이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못 박히신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누려야 할 평안은 환경적인 편안함 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모진 풍파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표현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흔적 존재, 이성적 존재,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 된지라”(창2:7)한 성서 말씀의 완성판이다. 창세기에서 이처럼 사람이 짐승과 달리 삶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면, 예수님은 그 목적이 바로 성령 받음, 사랑이 부어진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첫째 사람은 흔적이요 둘째(속) 사람은 영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뉘 죄든지 사하면
사도들을 포함해서 세상 어떤 존재라도 사람의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는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존재는 성령의 복음을 전하여 죄(탐심, 삶의 근본적 뜻을 모른 채 사는 자)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을 그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다른 관점으로는 빚진 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 받은 자가 성령,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여 죄 속에 있는 자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전하지 못한 자의 것이다.(겔33:1-9 참조)
실제로는 성령과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는 성령을 보지 못한 자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자가 성령을 전하지 않는 것은 숨을 멈추는 것과 다름없으며 성령,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은 것이다. 육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이 있다는 것,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성령과 사랑을 위해 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