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음 (마5) - 정광교회 박승현
간 음
"또 (옛 사람들에게)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27-32)
성경에서의 간음과 세상에서의 간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의 간음은 세상에서의 간음보다 더 의미가 깊고 넓다. 세상에서의 간음은 법적, 사실적 혼인 관계가 아닌 남녀의 부적절한 행위를 가리킨다. 성경은 이보다 한술 더 떠서 행위가 나오기 전에 마음속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마음속의 문제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미 간음이라 한다면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존재하는 사람들 중 간음의 문제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 예로 요한복음 8장을 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남자는 어디 갔을까, 구약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원래 간음은 홀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에 남녀가 같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면서 예수를 시험한다. 이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이 간음이냐?) 쓰시니(γράφω 그랍호 : 기록하다, 그리다. 미완료 능동태로 써 있다. 지금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쓰시고 있는 상태임. 세상적 정죄의 잣대만으로 상대방을 고소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네가 정죄하는 그것으로부터 너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느냐 묻고 있는 진행형이다) 저희가 묻기를 계속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3-9)
이처럼 성경적 간음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세상의 땅에 속한 어느 누구도 간음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려서 스스로 간음한 자이고 죄인인 것을 인식시키려는 의도만 있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적 간음한 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 뿐이지 간음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은 세상적 개념의 간음을 폭넓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관습, 법의 체계를 떠나 하나님의 자연스런 이치로 본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자연이며 남자는 여자에게 있어 자연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면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간음 상태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것은 여자(아내)를 보고(βλέπω 블레포 : 자발적 관찰,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지켜봄) 음욕(έπιθυμέω 에피듀메오 : 탐하다, 마음을 두다)을 품는 것이 간음이다. 즉 꽃을 보고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만 꽃을 꺾으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꽃을 꺾는 행위를 간음이라 하시는 것이다. 간음은 외간 남녀의 육체와 마음의 문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공식적인 혼인 관계일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소유(꽃을 꺾는 행위)하려는 행위가 간음이다. 상대를 상대로 인정하기보다 자기의 의식 상태 안에 가두려는 행위가 간음인 것이다.
음욕의 원인은 눈과 팔이 아니다
예수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했다" 하시고 또한 눈이 있어서 볼 수밖에 없는데 눈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게 만든 원인이 된다면 눈을 빼어 내버려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왼눈과 오른 눈 둘 중에 왼눈은 음욕을 안 품는데 오른 눈만 음욕을 품게 만든 원인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왼눈은 그냥 두고 오른 눈만 뽑아 버리라 하셨다. 눈이 있으므로 보게 되었고 보았으므로 음욕이 생겨진 것이라면 오른 눈만 뽑아내서는 안 된다. 왼눈도 뽑아내야 한다. 오른 눈이 여자를 볼 때 왼눈이 딴 짓하고 있지 않았다면 왼눈도 공범이다. 혹 왼눈이 여자를 안 보기 위해서 눈을 감았더라도 역시 공범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윙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체는 범인이 아니다
사람의 신체를 건물로 비유한다면 눈은 건물에 속한 창문일 뿐이다. 잘 닦인 창문의 유리를 통해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음욕을 품게 되었다고 그 음욕의 죄가 창문일 수 없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죄이듯, 눈은 죄가 아니고 눈을 통해 바라본 눈 속의 그 존재가 죄이다. 눈은 생각하지 아니 한다. 눈은 무엇을 품지도 아니한다. 그저 밖에 존재하는 대상을 인지할 뿐이다.
그런데 눈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속의 존재, 하나님을 모르는 그 무지의 존재가 오두방정을 떤다. 한 시각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예쁘다, 밉다, 갖고 싶다는 둥 온갖 망상을 피운다. 그러나 세상 모든 만물은 그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존재할 뿐이다. 미운 것도 예쁜 것도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자연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여자 혹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그 시대의 세상 풍조의 흐름에 자신이 깨어 있지 못한 결과이다. 개인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을 두고 예쁘다거나 밉다고 하는 것처럼 판단하는 무형의 기준이 존재한다. 예수님께서도 오죽하셨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했겠는가? 사람의 외모가 사람의 평가 기준이 된 것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된 역사이다. 아무튼 이러한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기 위해 눈을 뽑아야 한다. 특히 오른 눈을 뽑아야 한다.
오른 눈을 뽑자
눈은 죄가 없다고 해놓고 눈을 뽑으라고 하니 이상하다. 실제로 신체의 눈은 죄가 없지만 성경이 가리키는 오른 눈은 뽑아야 한다. 성경에서 눈은 잠든 선지자,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하나님 뜻인 줄 아는 그릇된 지도자를 가리킨다.(사29:10 참조)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전해주지 못하여 사람의 생각, 사단의 일, 더러움, 욕심 등이 없어지기보다 오히려 세상것에 음욕을 품게 만들거든 그 지도자와 결별하라는 것이다.
오른팔
그렇다면 오른팔은 무엇이겠는가? 진리의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길이지만 과정에 있어서는 지도자와 성도라는 공동체를 구성해서 가야 하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이렇게 공동체를 통해 진리의 길을 걸어갈 때에 오른 눈이 실족케(σκανδαλίζω 스칸달지조 : 죄를 짓게 하다. (욕심의) 덫에 빠지게 하다) 하거든 빼어 버리라는 것은 지도자를 바꾸라는 것이다.
오른팔은 공동체에 있어서 지도자의 오른팔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실례(實例)를 든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베드로이다. 오른팔이 지도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모르고 지도자를 위할 때 지도자는 자기 자신과 그 오른팔을 위해서 오른팔을 잘라 내야 한다.(마태 16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