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식 (마6) - 정광교회 박승현
금 식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6-18)
양식을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으로 구분하듯 금식도 겉사람의 금식과 속사람의 금식으로 구분한다. 구약성경을 보자. 육의 양식을 먹지 않는 금식을 한 후에도 금식하지 않고 사는 보통사람들처럼 그저 다투며 싸우는 것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어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58:5-6)라고 하였다.
즉 금식은 밥을 굶는 행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겉사람이 속사람(하나님의 정신)의 삶과는 관계없이 육체의 본성만을 위해 탐심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탐욕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육체를 가증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것이다. 다만 금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원하는 금식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 아니다. 육신이 속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여전히 육체가 육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본질적 진노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육체의 그릇된 습관을 버리게 하는 데 필요한 고육지책이 금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금식을 통해 자기를 세상사람 앞에 종교적 의인의 모습으로 포장하는 현실을 보시고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이 목적으로 둔갑된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금식의 근본 취지와 관계없다고 하시며, 금식으로 인해서 진정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기도와 금식
성경에서 기도의 핵심은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지려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금식이다. 기도를 할 때 육체가 본질적 진노의 그릇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진리가 아닌 지식일 뿐이다. 그 기도를 통해 성령의 지식은 맛볼 수 있겠지만 성령 자체는 획득할 수 없다.
성령의 사람은 귀신과 연합할 수 없고 겉 육체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줄 수 없다. 그렇기에 진정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일정한 과정이 도래하게 되면 반드시 금식과 병행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귀신을 내쫓는 권세는 기도와 금식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귀신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17장은 기록한다. 태산처럼 요지부동인 육체의 탐욕 그 자체, 더러운 의식 즉 '귀신'을 쫓는 데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오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한글성경에는 없음) 했다. 그러므로 참된 나와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의미를 마음(감정)과 목숨(이성)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이를 행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뜻(의지)이 육체의 그릇된 오랜 관행 때문에 제대로 펼쳐지지 않을 때, 영의 뜻이 육체 속에 펼쳐지도록 하기 위한, 즉 육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처방이 바로 금식이다. 이러한 수단적 금식을 하면 그 금식의 결과로 흉악의 결박이 풀리고 귀신이 나감으로 인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누리는 참다운 금식의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