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째 인을 떼실 때에 (계6) - 박승현 목사님
넷 째 인을 떼실 때에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계6:7-8)
청황색 말이 나오고 그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3-4)를 보자.
말씀을 통해 그릇된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내 안에 하나님이라는 관념적 대상은 있되 심정은 없고 마음에 지옥(분노, 사기, 질투, 미움)을 이자처럼 늘리면서 살아가고, 더 나아가 주위사람들까지 그릇된 존재로 만들어 배타적인 신앙관을 갖고 살다가 죽게 만든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0장20-21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성령이 없거나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하리라”고 했다.
마음속에 하나님 심정의 성령 없이 문자적인 말씀을 맹목적으로 좇아 관념적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게 하고, 내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하여 자신의 그릇된 관념에 상대도 동조하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을 사망의 지옥,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이른 것이다.
이사야서 5장 18-23절에도 “거짓으로 끈을 삼아 좌악을 끌며 수레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 도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을 단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 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하였다.
마태복음 23장13절 이후로는 “화 일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고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로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하였다.
이들은 무엇을 질타하신 말씀인가? 어떤 사람은 신앙에 대한 신념은 있지만 모래성 같은 제 이론에 근거를 두었으므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확신이 없다. 그런데도 배우는 자가 확신 없는 흔들리는 신앙을 전한 그 자의 가르침을 확고한 것이라고 인식해서 두려움이나 회의, 갈등,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신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무지몽매한 경로를 따르는 것을 사망의 청호황색 말 탄 자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표현한 것이다.
밭을 두고 비유하자면, 천국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길가의 밭과 같은 사람이 청황색 말 탄 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할까. 믿고 따르기는 하되 말씀과 예수님의 삶을 한결같이 돌아보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반성하며 결심하는 태도가 옳지 않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