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계명(ενιολη; 엔토레)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으므로 그 사랑 안에 살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그들 모두가 그분의 소리(계명)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계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사랑을 느낄 수 없다.
바울은 현대인들이 남발하고 오용하는 바람에 오히려 가엾어지고야 만 아름다운 그 말, 사랑을 진실을 담아 아주 간명하고 담백한 언설로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어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사랑)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4-10) 그러나 바울이 사랑에 대해 어떻게 표현했든 간에 우리들 자신의 내면에 그 사랑을 담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좋은 생각,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은 지(知)와 감정을 받아들여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자신의 육체에 새겨야만 오롯이 자기 것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사랑을 사람이 온전히 제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과정을 밭의 비유를 통해 일러주셨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13:23)를 말함인데, 성경에서 깨닫는 자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서 온전한 상태의 존재가 된 것, 하나님 즉, 사랑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본인이 자각함)하는 자”(눅8:15)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바울처럼, 바람직한 믿음의 선진처럼 사랑의 존재가 되길 원한다면 마땅히 그들처럼 행하고 살아야 한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원하는 삶을 잘 헤아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면, 머지않은 장래에 자신이 구하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랑’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이성’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그러나 그 사랑은 타인이 인식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또 타인이 알 만한 정도라고 하더라도 제 안에 담아둘 일이지 다른 사람이 알아줬으면 바라는 것은 사랑에 거하는 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세상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랑이란 대개 탐심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힌 사탕발림일 뿐 진정인 경우가 드물다. 사랑의 존재가 정작 자기 곁에 있는 것은 모르고 물색없는 곳에서 사랑을 구하고 원한다며 침이 마르는 그 모습이 가엾다. 진리의 성령(진리의 성령 된 존재를 영접한 예수나 바울 같은 존재)이 와도 세상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것이다.
“보혜사 진리의 영이 아버지에 의해 세상에 오겠으나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사랑 안에 거하겠음이라)”(요14:16-20)고 이르시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의 존재와 연합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한데 ‘저이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이 불타고 있군’ 하고 인정받는 것이 대수일까? 영적인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은 무의하다. 그저 영적 현상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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