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원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1-3)
세상의 영화는 물질, 명예, 권세로 치장한 삶을 이르겠으나 하늘의 영화는 다르다. 그것은 육신을 얻어 살되 그 육신만 위한 삶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하는 다른 이들까지도 그의 삶을 따라서 살 수 있게 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절에서 당신이 세상을 이겼노라 선언하신 다음, 이어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인 당신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신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안타깝게도 육체의 고통에 따라 자신의 의지나 결심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고 변덕을 부릴 수도 있다.
바울조차 “내 속사람(내 마음=νους; 누스)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고 말했다. 생불(生佛) 대접을 받는 달라이 라마도 어떤 순간에도 자비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모른다. 내 마음은 의지와 관계없이 너무 지극히 순간적이고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떤 상태가 될지는… ” 너무 솔직하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로폰라’라는 티벳 승려 이야기를 통해 용서와 평화, 평정심에 대해 말한다. 로폰라는 중국의 티벳 침공 당시 체포되어 18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간신히 탈출했는데 달라이 라마가 그를 만나 두려웠던 적이 있는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중국인들을 미워하게 될까 봐, 중국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용서, 달라이 라마 지음. 류시화 번역, 오래된미래, 2004)
인간은 한계가 분명한 육체를 거처로 삼기에 사랑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배반할 수 있는데 그러한 순간에도 사랑의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런 의미로 아들인 당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잔혹한 모멸,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파고드는 크나큰 육체적 고통,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슬픔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세상을 향한 사랑, 십자가에 못질하는 사람과 그렇게 시킨 아들에 대한 긍휼이 멈추지 않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래야만 참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참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며 영생을 넘겨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신의 성품으로 충만한 삶을 향유하며 사는 것, 요한복음 12장 50절에 이른바 “나는 그의 명령(εντολη; 엔토레,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신의 소리)이 영생인 줄 안다”고 하신 그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한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 참된 사랑의 성품과 그러한 삶을 육신을 지닌 채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자신도 그렇게 살게 되길 믿고 소망하며 실천할 때 영생은 환상이 아닌 실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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