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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죄사함과 일어나 걷게 됨 (마9)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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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과 일어나 걷게 됨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태9:5-8)

 

죄는 사망의 원인이며 죄사함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진짜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 죄사함을 받음이 일어나(εγειραι 에게이라이 : 살아나) 걸어갈 수 있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죄사함을 받은 자가 일어나(살아나) 걷지 못한다면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에 대한 검증은 일어나 걸어가는, 즉 지금 현재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원, 즉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 삶의 태도와 변화가 죄사함의 증거가 된다.

죄사함
죄사함을 받으면 내적 변화와 외적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한쪽에 변화가 있었는데 다른 한쪽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외적으로 변화가 있었는데 내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사함의 구원과 무관한 것이며 외적 삶의 변화된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일 뿐이다.

만약 내면은 변했는데도 외적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진정한 죄사함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교만함의 극치일 뿐이다. 죄사함은 겉과 속이 동시에 변하는 혹은 속의 변화에 따라 겉으로도 반드시 변화가 뒤따르는 현상이다. 속은 변했는데 겉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은 죄사함, 쓸모없는 죄사함, 자칭 죄사함일 뿐이다.

죄사함에 의한 내적 변화란 물(지식, 형식, 언어, 진리)에 의한 신앙의 삶에서 포도주(진리의 존재, 기쁨의 존재, 성령의 존재)에 의한 신앙의 삶으로 옮겨진 것이다. 기쁨과 감사가 없어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게 되는 구태의연한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식과 습관에 묶인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에 넘쳐서 그 신앙이 아니면 삶의 토대가 없어지게 될 정도의 참신앙으로 옮겨지는 변화를 말한다.

이렇게 내적 변화를 겪은 사람은 반드시 외적 삶의 변화도 동시에 겪게 된다. 그것은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더 이상 세상적인 무언가를 자신만을 위해 구하지 않는 삶의 태도이다. 더 이상 세상것을 구하지 않아도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구걸하려는 의식 혹은 구걸하는 태도에서 벗어난다. 구걸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삶의 태도를 얻는다. 자립하는 태도를 갖지 않으면 자족의 삶이 자기 손에 있을 수 없다.

타인에게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삶의 방편이 타인의 손에 달려 있는 불행한 사람이다. 내 삶의 자족을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서 스스로 당당히 영위하려는 태도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죄사함이다. 자족을 하는 데 있어 타인으로부터 무엇이 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자족이 아니다. 타인이 아무것도 주지 않을 때는 무엇으로 자족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겉과 속의 변화가 죄사함이며 구원의 현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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