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19-21)
기도와 금식을 통한 믿음의 말씀은 역사하는 힘이 크다
제자들이 왜 우리는 벙어리 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믿음이 적은(실은 적은 것이 아니라 없는) 연고니라 하시며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이론의 말만 있고 기도와 금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말씀을 두뇌(이성)를 활용하여 배우게 된다. 기도와 금식이 없는 말씀공부는 자칫 상대방에 대한 긍휼을 갖기보다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만 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워나가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기도와 금식을 해야만 배움이 자신을 교만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의 역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심정을 갖게 하는 역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탕이 없는 가운데 올리는 기도는 편협한 자기 기준에만 따르는 의식을 굳히게 되어 그릇된 신앙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해야만 남을 정죄하지 않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신앙으로 앞서간 자에게 경외심을 갖게 된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의 문에 막 들어서려는 믿음의 초보자 혹은 세상 목적에 뜻을 둔 자들에 대해 우월감이나 경멸이 아닌 안타까운 심정,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한편 금식한다는 것은 밥을 굶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처한 상황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적극적인 신앙자세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을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58:6)라고 했다.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금식의 목적은 자기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 신에 의한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짐 때문에 압제당하는 자를 진리로 자유케 하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일상적인 삶의 태도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식음을 중단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금식과 기도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기도와 금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아직 세상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심정의 열심이 없으므로 귀신이 태산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는 만약 너희에게 상대를 향한 하나님 심정의 열심이 겨자씨만큼만 있었더라도 태산 같은 귀신일지라도 움직이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그것은 너희가 아니요, 너희의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심정을 하나님이 아시고 귀신을 옮겨주셨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작게나마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있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심정을 갖기만 하면 역사는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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