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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빌라도가 가로되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마27)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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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가로되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15-26)

 

군중과 빌라도
군중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군중의 진리 또한 진리가 아니다. 군중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보다는 떡이다. 공자도 백성에게는 떡이 예(禮)라고 했다. 떡이 없으면 예의범절을 갖출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상에 나아가려고 당신의 상태를 점검하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진리)으로 살아야 하느니라"(마4:4)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진리를 위한 떡의 필요성을 외치셨지 떡을 위한 진리의 필요성을 외치신 것이 아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생애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1:9)라고 하면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 분을 풀어주려는 이방인 총독 빌라도를 협박하면서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지 않게 자신의 진리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진리는 타인에 의해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타인의 진리와 비교되지 않는다. 그것을 바울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9-11)라고 했다. 바울의 진리는, 너희에게 맞는 영적 은사에 의해 너희가 진리의 존재가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진리가 나타나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꽃나무에게는 꽃, 유실수에게는 과실, 벌에게는 꿀이 진리이다. 유실수에게 아름다운 꽃만 요구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중 신앙의 잘못은 자신들이 원하는 떡의 진리를 예수께 요구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처음부터 진리의 떡을 외쳤지만, 군중들은 예수를 오해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내주었다.

"백성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6-28)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진리와 친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난은 나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오히려 많다. 타인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진리와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세상적 역량보다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예수를 바로 알아갈 수 있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주지 않고 자신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

신앙에는 군중의 부류가 있고 빌라도 부류가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옳은 줄 알면서도 군중의 압력에 밀려 뒷걸음질을 친다. 하나님 앞에 무지몽매해서 예수를 죽이는 군중이나 머리로는 알면서도 세상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옳은 길을 외면하는 빌라도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일 수 있다. 죽이라고 내몬 영적 백치 상태의 백성보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던 헛똑똑이 빌라도의 죄가 더 막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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