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아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4:22-31)
성경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율법을 따르는 사람을 “종”이라 하고 복음, 진리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아들, 자유자”라고 한다. 바울이 말하기를 구약의 인물이며 믿음의 조상(시작)인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쳐 주시는 비유(알레고레오 ; 어떤 사건 속에 숨겨진 진리의 참 뜻)라고 했다. 믿음이 시작된 인물인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비유를 통해 믿음의 생활이 두 부류로 구분된다.
사람이 믿음의 대상을 열렬히 찾아가면서 그 존재를 위해 수고와 열심을 다하는 것이 세상의 종교가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알아 가다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친히 사람을 위해 열심을 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신앙의 대상을 찾고 열심을 내는 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율법이요 종이라 한다. 반대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을 알고 또 오셔서 자기 안에 임하신 성령이 붙잡고 이끌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의 대표 격인 바울 사도처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복음의 자녀요 진리와 연합된 자유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세상의 최고 가치는 남보다 더 나은 생활, 물질, 명예, 권세이며 죽어서도 남과 다른 더 나은 천국을 꿈꾸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자녀를 “종”이라 한 것이다. “종”은 일에 대한 대가를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기에 종이다. 복음, 진리의 자녀를 상속자라 하는 것은, 자녀는 대가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지적했듯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람이 제 나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섬김의 대가로 이생의 자랑거리를 구하거나 이생 너머의 천국을 원할 뿐이다. 그나마 그 천국이란 세상의 비루한 가치관을 덧입혀 휘황찬란하게 꾸며낸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
[참고]“보혜사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 즉 윤리와 도덕 수준으로 규정하여 우리를 그 한계에 묶어 놓을 우려가 있다. 윤리와 도덕을 무기로 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신앙인을 조롱하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다. 바울은 그것을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성령)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22-30)고 표현하였다.
이 내용은 바울이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이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조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게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21:8-19)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세상에서는 율법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뱀의 지혜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해서 반드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 들려면 제 안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은혜를 입어야 한다.
율법은 그것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면 악한 것이 아니다. 율법 또한 선한 것이다. 율법을 저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의무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발적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곧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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