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인을 떼실 때에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계6:5-6)
검은 말은 가난과 기근, 저울을 든 자는 인색함을 상징한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혹은 보리 석 되라고 했는데,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으로는 그날 하루 연명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αδικεω 아디케오 ; 잘못된 일, 실수 가운데 빠진다. 여기서는 감히 생각지도 말라는 것으로 해석됨)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또 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24:3-7)가 그것이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세상 끝에는 기근과 지진이 많아질 것 같지만, 성경은 물질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말씀의 삶을 사는 존재)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했다. 셋째 인을 떼실 때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나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계시의 말씀이 있기 전에는 지식이 진리인 줄 안다. 또 배움이 곧 삶인 줄 착각해서 마음의 갈등도 느끼지 못하고 거들먹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은혜를 통해 참된 말씀을 따르는 삶에 눈뜨게 되자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단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 은혜 없는 삶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한 데나리온어치 밀 한 되 혹은 보리 석 되처럼 초라하다는 것, 그리고 그저그런 일상이 아니라 감람유와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처럼 잔치마당 같은 천국 된 삶을 살기에 턱없이 모자라서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삶에서 실제 구현되는 사랑이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저울질을 해놓은 것처럼 좀스럽고 인색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를 두고 “내가 비록 말에는 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고후11:6)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식(γνωσσ ιζ; 그노시스)은 단순한 지식이라기보다는 보고 듣고 조사하고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얻어진 앎을 말한다.
영적 눈을 뜬 자의 태도는 어떠한 것인가 ? 그것은 육신을 통한 삶(말)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지식)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거기에 진지하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서 안다고 해도 그것들을 자기 삶과 믿음에 대한 반성과 질문, 고민을 통해 반영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아는 것이 곧바로 삶이 되는 영적 세계를 소망하며 육체 벗기를 꿈꾸는 것이 신앙인이 갖추어야할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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