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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 받지 아니한다 (요3) - 박승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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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 받지 아니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8-2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마1:21) 하고자 세상에 오셨으며 막연한 구원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아니다. “죄에서 구원”을 한다고 하였는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약1:15)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현상 즉 불안, 초조, 근심, 걱정, 열등감, 우월감, 낙심, 교만 등을 말한다. 지나친 책임감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나 무책임하게 방탕한 행동 때문에 타인의 짐이 되고 있는 자나 죄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죄로 부터의 구원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인보다 낫다고 우쭐하거나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보다 나은 점이 있음을 은혜로 여기고 나은 만큼 세상에 대해 빚을 진 심정을 가지고 나누어야 한다. 또한 타인보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시기나 질투를 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나은 자를 존경하고 배우는 수고를 하는 것이 죄로부터 구원되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존경할 자를 존경했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겼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예수 자신처럼 세상 사람도 하나님을 믿기를 원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1)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나처럼 하나님을 믿고 나처럼 너희도 살라’ 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으나 더 정확하게는 심판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경을 한쪽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12:35-37) 하였다.

즉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심판의 삶을 살고 있느냐 아니냐로 나누어 졌다는 것이다.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게 되어지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심판과 무관한 구원된 축복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존경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약2:13 참조)

정죄 (κριδις ; 크리시스 : 심판)
신앙에서의 정죄, 즉 심판은 어떤 권세있는 자가 피고인을 심판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랑의 권세를 가진 자가 그 사랑을 무례히 행치 않으며 세상을 향해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사랑을 받지는 않고 사랑이 없는 삶을 살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빛은 생명이며, 생명은 따스함이고 사랑이다. 성경에서 생명의 유무는 육체의 호흡 유무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고 없음에 둔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4)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오셨다. 바로 생명인 사랑을 가지고 오셨는데 세상은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다. 곧 사랑보다 심판을 택하므로 인하여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업신여기는 심판을 하고 산다면 그것이 자신의 심판인 것이다.

자신보다 못한 이를 심판하면 당연하게 자신보다 잘난 이에게 자신을 심판하는 권리를 준 것이다. 또한 자신보다 잘난 자를 시기, 질투하면 자신보다 못난이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에 찬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마땅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2:13)고 했다.

사랑과 긍휼이 있는 삶이 생명이 있는 삶이요, 사랑과 긍휼이 없는 삶은 생명이 없는 삶이다. 사랑과 긍휼이 있도록 산다면 하루를 살아도 여한이 없다. 그러한 삶을 산 예수는 삼십 초반에 세상에 의해 십자가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다 이루었다” (요19;30)고 하셨다. 이 말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내 삶은 후회함이 없다” (고후7:10)는 말과 같다. 사랑과 긍휼이 없는 삶은 천년을 살아도 산만큼의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표현을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다. 육체의 생명은 참 생명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참 생명은 육체의 존재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육체가 육체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육체가 생명의 말씀을 인하여 영적인 것을 위하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속사람을 위해 살 때 그 육체의 삶은 심판을 받지 않는 삶을 산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삶은 악을 행한 것이다.

세상은 세상만을 위해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위해 살라고 하는 예수보다 세상 것을 부추기는 유다를 좋아한다. 더 나아가 세상은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30:10)하면서 스스로 심판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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