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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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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6-2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 하셨다. 보내면서 당부의 말씀으로 비둘기의 순수성을 속에 지니되 뱀 같은 지혜로 무장해야 한다고 하셨다. 세상에는 잃어버린 양보다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그 추종자들이 많으므로 복음을 전파하기도 전에 그들에 의해 세상적 종교의 관원들에게 넘겨져 고난을 받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뱀은 교활함의 상징이지만, 상대방을 이롭게 하기 위한 교활은 지혜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뱀의 공격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자. 뱀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모르고서 공격한 것이 아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은 아닐지라도 백전백퇴(百戰百退)하지는 않는다. 상대를 알고 싸움을 하면 언젠가는 승리한다. 뱀은 아담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한계 밖에서 공격했다.

아담은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아담이 알고 있는 부분이 너무나 취약하고 모르는 게 더 많다. 그 모르고 취약한 부분을 뱀이 공격해 들어왔고 아담은 항복한다. 뱀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무시한 채 공격한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척하며 공격해서 결국은 아담을 무너뜨린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 했다. 예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24)고 하셨다.

하나님의 일꾼들도 지혜를 바탕으로 일해야 한다. 지금 현재 선택받지 못한 존재한테도 그가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섬길 자를 찾아야 한다. 우선 잃어버린 양이 되게 해야 한다. 길 잃은 양이 되게 하려면 세상의 노예로 살며 맹목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의 욕구를 잘 알고 난 다음에야 그 욕구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의 욕구가 없겠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결국은 또 다른 욕구만 재생할 뿐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진정한 욕구의 해결은 외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적으로 욕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있어야 한다. 구약에서 비둘기는 노아 방주 이야기에 등장한다.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물고 방주로 돌아와서 물이 감한 것을 알려주었고, 그 뒤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이 방주에서 나와 땅에 다시 정착하도록 한 동물이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 즉 신앙공동체에서 일정한 기간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종국은 땅, 즉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사람이 땅에서 살 수 있게 될 때까지만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양육기관이다. 사람은 때가 이르면 방주를 떠나야 한다. 노아의 방주를 떠날 때란, 비둘기가 방주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때이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성령의 오심을 '비둘기같이 오셨다'고 표현한다. 성령이 오심은 분명한데 성령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을 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세상과 격리되지도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영접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과정에서 뱀의 지혜로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도 있고 그 욕구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비둘기의 순결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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