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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증거 되기 위한 고난 (마10)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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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되기 위한 고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6-20)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할지라도 날카로운 송곳이 주머니 속에서 표시가 나듯 진리는 드러난다. 사람들의 편협(偏狹)하고 조악한 종교의식은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므로 진리는 뭇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진리는 그가 구축한 종교의 성을 깡그리 무너뜨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값싼 평화와 막연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진리는 배척당하기 쉽다
진리는 진리의 존재가 아닌 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오만과 편견을 부수고, 묵은 포도주를 버리고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헌 옷에 생베조각을 덧대기보다 헌 옷을 버리고 생베로 옷을 만들어 입게 한다. 묵은 포도주 같은 익숙한 의식의 편안함을 버리고 새로운 포도주 같은 생경한 의식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편안한 헌 옷, 관행화된 종교습관을 버리고 처음에는 조금 불편한 새 옷을 입어야 한다.

헌 옷이라는 낡은 습관을 버리는 고통을 감수하기 싫은 세상의 뭇사람들은 진리를 영접하기보다 배척하기 쉽다. 나아가 묵은 포도주를 즐기며 헌 옷의 편안함만 추구하는 패거리 종교의 추종자들은 소수 혹은 외로운 진리의 존재로서 종교의 본질을 설파(說破)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

임금과 총독에게 끌려가다
진리의 복음은 사회의 합의된 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의 존재는 사회의 합의된 윤리, 도덕, 문화를 승화시키는 기능은 할지라도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다. 진리는 윤리와 도덕에 제한받지는 않지만 그것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왜 뭇사람들과 종교, 정치지도자들까지 진리의 존재를 핍박하는가? 보이지 않는 세상 신의 미혹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은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헛된 욕심과 의식을 이용한다. 편협한 의식을 가진 대중들이 다스리는 데 수월하기 때문이다. 군중은 지도자들의 헛된 욕심과 의식의 종으로 산다. 그 결과 손해를 보는 것은 지도자가 아닌 바로 자신인데, 문제는 그 손해가 지금 당장 닥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렇듯 대중은 막연한 욕심의 소망이라도 갖고 살아야 지금의 숨 막히는 현실문제를 잠시라도 망각할 수 있으므로 진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진리는 세상 종교나 정치지도자들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존재자의 삶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진리의 존재는 세상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을 고정시키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움직이는 의식을 두려워한다. 값싼 진리의 지식이 주는 익숙한 평화를 누리려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를 전하는 자를 배척한다. 따라서 타성에 젖어 안온한 평화를 누리면서 세상의 종교나 정치지도자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악함이 아니다. 자기 기준의 선을 고수하려는 행위이다. 진리의 존재는 잠자는 자를 깨우지만, 달콤한 잠에 빠진 사람은 깨우는 자를 싫어한다. 진리의 존재는 그것을 알기에 임금과 총독에게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군중의 잠을 깨우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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