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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밭과 씨 뿌리는 자 (마13)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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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과 씨 뿌리는 자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1-8)

 

밭과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성경에서의 밭은 마음을 나타낸다. 때로는 밭 대신 집, 돌, 나무 등으로 표현하는데,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관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밭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씨는 씨 뿌리는 마음,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을 나타낸다.

길가의 밭
하나님이 보시기에 길가의 밭은 사단한테는 그야말로 좋은 밭이다. 사람은 본질상 진노, 욕심, 겉사람 중심의 삶을 지향하며 산다. 길가 밭의 사람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마음밭을 기경하지 않은 사람이다. 길가 밭에 뿌리를 내린 삶의 목적은 육체의 배부름에 있다. 세상 기준인 도덕으로 볼 때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길가 밭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 곧 씨를 새들이 먹어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새는 악한 자, 사단, 마귀, 사람의 생각을 말한다. 욕망의 노예가 돼버린 상태에서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길가 밭의 사람도 삶의 행로에 따라 육체 중심의 삶에서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삶의 우환, 세상적인 것을 나름대로 이룬 뒤의 허무 등에 의해 길가 밭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밭, 즉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로의 전환이 생기기도 한다.

밭의 단계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네 가지 밭은 길가 밭에서 돌밭, 돌밭에서 가시밭, 가시밭에서 좋은 밭으로 발전돼 간다. 현생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길가 밭에서부터 좋은 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출발선으로 제가끔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길가와 돌밭, 가시밭의 상태를 차례로 거쳐 좋은 밭의 삶에 이르게 된다.

현생에서 좋은 밭의 삶에 이르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 등 구약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자.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길가 밭의 상태이고, 홍해를 건너는 상태와 광야에서의 불평과 불만의 삶은 돌밭이라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살다가 죽게 되지만 가나안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던 모세는 상징적 그림으로만 본다면 가시밭의 삶을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가나안 정탐 후 곧바로 가나안 입성을 주장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좋은 밭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돌밭은 하나님 말씀의 싹이 나오기는 했지만 마음밭을 깊게 기경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자신의 육체적 삶을 규명하지 못한다. 돌밭의 사람은 육적 삶이 자신의 의도대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다. 돌밭의 사람은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해도 하나님 말씀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체험적 삶이 없다.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서 저자는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다.(히5:13)

길가 밭, 돌밭과 가시밭
밭의 비유에서, 사단에 의해 말씀의 씨가 심어지지 못한 마음밭인 길가 밭을 제외하고는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씨가 싹트는 것까지는 성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개념에서는 돌밭이 된 사람부터 종교성의 소유자라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종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길가의 사람도 종교인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바리새인은 길가의 존재이지만, 바리새인 자신들은 스스로를 좋은 밭으로 여긴다. 말씀을 가지지 못한 자는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분하기 쉬운 방법이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을 목적으로 사는지 보면 된다. 혹은 세상것,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사느냐를 보면 말씀을 가진 자는 알아볼 수 있다.

한편 돌밭의 존재라도 하나님 말씀의 삶을 기쁨으로 살기는 한다. 그런데 이들은 말씀, 즉 신앙 때문에 세상적 어려움이 생기면 신앙의 가치관을 버려서라도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방식이 있다. 배우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게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배운 것과 사는 것을 별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더 나아가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배움도 마찬가지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진리, 하늘, 바른 가치관의 삶은 멀다. 눈앞에 펼쳐지고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의 삶은 긴박하다. 그래서 돌밭의 사람들은 배우고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살기보다는 훗날 후회할망정 당장 제 몸 편한 대로 산다. 다이어트 중에 매번 후회할 줄 알면서도 식욕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돌밭의 존재가 사는 것도 그렇다. 돌밭의 존재들은 몸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돌밭 다음 단계가 가시밭의 존재이다. 가시밭의 존재는 하나님 말씀의 씨가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고 어떤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다. 다만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사단의 가시가 하나님 말씀의 기운을 막고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통한 참다운 내적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가시밭의 존재는 머리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욕망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 육적 목숨을 미리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육적 생각을 쫓는다고 한다.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 상황에 따라 욕망이 꿈틀댄다면 아직도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증거다.

좋은 밭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밭은 사단이 볼 때 길가 밭이다.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8)라고 하였다. 성경에서는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킬 때 '죽은 자' 혹은 '사망의 어둠이 덮은 자'라고 한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는 생체적인 몸은 살아 있지만 몸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몸을 통해서 사는 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적 기준의 몸은 실상 죽은 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좋은 밭은 세상의 기준에서 세상사람들이 추구하고 관심을 갖는 일에 무가치함을 느낀다. 도리어 그들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어루만져 준다.

그러나 좋은 밭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문전옥답이든 처음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돌투성이인 황무지였다. 그것을 농부가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개간하고 기경하여 옥답으로 만든 것이지 처음부터 옥답은 아닌 것이다. 좋은 밭, 옥답의 존재는 말씀을 끊임없이 마음 밭에 뿌린다. 결실을 맺기 위해 말씀을 한결같이 공급받는 수고를 하고, 말씀의 물이 흘러넘칠까 염려하면서 지키는 수고를 하며, 말씀이 육신에 스며들게 하여 그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과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는 자이다.

가시밭의 존재도 말씀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이 없으므로 사단의 생각과 싸워 이길 힘이 없다. 다만 말씀의 장식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의 존재에게 말씀은 장식용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순간순간 피어오르는 세상적 욕망, 잡초를 뽑아내는 수고를 쉬지 않으면서 자라는 곡식의 성장에 따라 기쁨을 한껏 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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