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의 이유 없이 이혼 당한 여자의 문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9-12)
세상의 결혼관과 하나님 나라의 결혼관은 같지 않다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2)라고 일관되게 말하신다. 나아가 "여자(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하시면서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을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하신다. 차라리 이혼 당한 여자에게는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 답변을 하지 않으신다. 대신 예수 자신과 하나님 나라의 결혼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으신 것은 그 질문은 답변할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그러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결혼관과 하나님 나라의 결혼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와 예수님 당시에는 사회적 관행이라는 명분하에 그릇된 결혼관이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결혼관을 현실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기 어렵거니와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또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그릇된 결혼관, 이혼문제를 좌시할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혼녀에게 장가를 드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그 여자와의 결혼이 자신에게 간음에 해당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 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이혼녀가 어떤 여자든 간에 법적 문제만 해결된 정식 이혼녀라면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예수께 질문을 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하자고 합의해도 그것은 결코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또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고 옳은 것을 그릇된 것이라고 우겨도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결혼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시집, 장가를 가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결혼은 분명히 있다.
타고난 자라야 하는 고자
여기서 고자란 육신에 흠이 있는 자가 아니다. 육신적으로 고자라고 해서 이성에 대한 욕망까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자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인해 육신적 본능의 성향까지 바뀐 사람을 말한다. 그것을 바울은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는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고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고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고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함이라"(고전7:32-35)라고 설명했다.
제자들은 이혼녀에게 장가를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께 질문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에 예수께서 동의해 주시는 것으로 사회적 관행에 따른 문제에서 면죄부를 받기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결혼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울과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생각이다. 어미의 태로부터 난 고자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렇게 된 사람이다. 사람이 만든 고자는 세상의 명예와 존경을 얻으려고 마음에 음욕은 품고 있으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는 성령에 의해 육신적 결혼보다 영적 신랑인 그리스도와의 결혼이 삶에 의미가 있다고 깨달은 바울과 같은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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