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시기까지
성경의 주제 중 하나는 가진 것을 버리고 탐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리에 의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과 아비, 친척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것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세는 백성을 애굽(아브라함에게는 고향, 친척, 아비의 집)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광야는 자기를 둘러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상징이다. 광야는 나라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다. 거기에는 재물도 없다. 다만 가나안(진리의 영토)이라는 해방구를 찾는 이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만을 소유할 수 있는 곳이다. 여행길에 필요한 것은 생활필수품이지 사치품이 아니다.
소유는 광야에서는 짐이 될 뿐이다. 탈무드에 정의되어 있는 장막은 일정한 지역을 점유하고 사는 고정된 주거지가 아니라 임시 주거지를 말하는 것이다. 집은 사는(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거주하는) 곳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이다. 소유가 아니라 생활이 목적이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솥을 그리워하고 튼튼하게 서 있는 집을 동경했다. 현대인들도 이런 마음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자유는 없을지라도 배부른 음식, 편안한 잠자리만 보장되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배부르고 편안한 종으로 살 때보다 버려야 할 것뿐 아니라 갖춰야 할 것도 많다. 필요 이상으로 배부르면 그것도 사치로 여겨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그 무엇도 내 삶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힘을 갖춰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생활하는 데서 오는 불확실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거친 광야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어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약속 받고 견뎌나가게 된다.
광야로 나온 유대인들이 필요 이상의 양식을 걷게 되면 썩어서 냄새까지 났다. 역량 이상의 재물은 자신을 썩게 하고 영혼을 마르게 하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자는 먹을 만큼 거두었더라"(출16:17-18)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많이 거둔 자의 유익도 적게 거둔 자의 손해도 없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3절에 보듯이 창세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셨는데, 당신의 안식을 백성들이 배우도록 하시려고 광야 생활이 준비되었다. 그 광야 생활에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안식일의 준수였다. 모세는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잘 준행하게 하려고 십계명을 받아왔다. 알다시피 그 중 한 계명이 안식일 준수였다. 안식일 준수의 핵심은 축재와 탐욕, 소유에 대한 경계이다.
또한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개념은 음식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모세는 금요일(유대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에는 평상시보다 두 배의 음식을 모으라고 말한다.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칠 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출16:26)가 그것이다. 안식일은 성서의 개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훗날 유대교의 핵심적인 의례가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방랑하던 기간에도 엄격히 지키던 계명이다. 그들은 수천 년을 뿔뿔이 흩어져 살며 세상으로부터 모멸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킬 때면 왕과도 같은 긍지와 위엄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로서 지금 우리에게도 유익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세상적 욕망의 종이 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다. 기도하는 동안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맛보는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실감할 수 있다. 어떤 종교의례라도 자기를 존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런 선한 존엄과는 무관한 의례이거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감을 느끼려는 의도로 행하는 의례는 어리석고 불쌍한 짓이다. 안식일은 일 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노동의 수고에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세속적 의미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물론 쉬고 난 다음에야 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은 육체를 쉬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자연적 의미의 안식일
안식일은 사람들 간의 조화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완전한 조화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휴식이다. 이 날에는 어떤 것도 파괴되거나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싸움이 그치는 휴전의 날이다. 사회적 변화도 발생하면 안 된다.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를 뜯는 일까지도 이 조화를 깨트리는 것으로 간주되며, 성냥 한 개비를 켜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집 마당에서는 무거운 짐을 옮겨도 되지만, 길거리에서는 어떤 것도 나르고 옮길 수 없다. 비록 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운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짐을 옮기는 수고를 금지한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소유한 땅으로부터 어떤 물건을 다른 사람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인데, 이는 재산의 이동을 금한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생활하며 기도하고 공부하고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기쁨을 만끽하는 날이다.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인간은 안식일에 온전한 자기 자신, 즉 최초의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누렸던 그 자연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포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메시아의 시대를 영원한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안식일에는 세상살이의 애통이나 슬픔까지도 금기이다. 시간이 정지된 에덴의 아담처럼 순수한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파루시아(재림, 나타남) 되었음을 인식한 사람은 정과 욕심이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탐심이란 우상 때문에 생기는 걱정, 근심, 불안, 초조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뜻이 그것이다. 즉 안식하고 평안하라고 하신 것이다.
적극적 의미의 안식일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근거하여 경우에 따라 의인이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원칙적으로 인간의 필요가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다.(막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을 적용할 때와 초월해야 할 때를 결정하셨다.(막2:28) 마태복음 12장 1절 이후에 사람의 생명을 살게 하는 일이 안식일 계명보다 우선한다는 점, 그리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예수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의 자비나 사랑의 법(호6:6)으로 훨씬 더 절박한 명령이 부과된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명령이다.
또한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 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롬14:5-6)라고 했다. 즉 안식일의 주인이 된 안식의 존재는 아직도 안식일 자체를 존재화시키지 못하고 날짜에 의미를 둔 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안식일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 또한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어진 자, 즉 안식의 존재자가 된 자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안식일에 안식하셨다. 그것은 세례를 베풀어야 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은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인간에게 그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몸소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경의 모든 문자가 심비에 새겨진 자라면 문자적인 성경의 의미에 매이지는 않겠으나, 오히려 아직 어린 신앙인을 위해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마치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 참고
- 안식일
תבשׁ ; 샤바트 : σαββατά ; 사바타의 단수와 복수
- 출20:8-11
안식일(단수)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절)
여호와의 안식일(단수)인즉(10절)
- 출31:13
나의 안식일을(복수) 너희들은(복수) 지키라
- 레19:3
너희들은(복수)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복수)을 지키라
성경에서 안식일은 대부분 단수형으로 쓰인다. 그러나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안식일은 목적어로 쓰이는데, 주어가 복수형일 때 안식일도 복수형으로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르고 환한
마태복음
초판 1쇄 인쇄 2009년 6월 25일
초판 1쇄 발행 2009년 6월 30일
지은이/펴낸이 : 박승현
펴낸곳 : 정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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