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망
마8:21-22절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죽은( νεκρός ; 네크로스 ) 자들로 죽은( νεκρός )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대답하셨다.
성경에서 죽음(사망)을 일컫는 단어로 핵심적인 것이 둘 있는데, 첫번째는 ‘네크로스 죽음’이다. 네크로스 죽음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종교성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는 무관한 사람,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보여지는 물질세상에만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을 네크로스 죽은 자라 한다. 두번째 죽음은 ‘다나토스( θάνατος ) 죽음’이라고 한다. 이 죽음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 즉 율법의 행위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세상에서 자신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탐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숭배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이 다나토스 사망 당한 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를 보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어떠했는가?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가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고 되어 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고 했던 사람들이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고 생명과를 먹어야 산다”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생명과는 먹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어 버렸다. 그러고도 제 영혼이 죽은 줄(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알지 못하고 외적인(율법적인) 신앙행위(무화가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나 하고 있는 자신이 잘하는 줄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선악과와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비교할 만한 것을 신약에서 찾아보면, 각각 율법(돌비)과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선악과가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선악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벌거벗었음)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5-14) 했다.
율법, 선악과의 기능은 죄 혹은 벗었음을 깨닫는 것이지 그 벗은 것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벗었음을 가리는(숨기는)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람은 벗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가서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는 결코 생명과를 먹을 수 없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고 했다.
사울이었던 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사망(선악과, 율법신앙)에서 생명(생명과, 은혜의 복음신앙)으로 옮겨진 것을 이해하기 쉽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다나토스)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네크로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11)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성령 없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식의 신앙 행위야말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요 율법의 행위이며 다나토스 사망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생명과를 먹은 것이요 네크로스 죽음에서 부활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떡 양식은 일용할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생계수단일 뿐 자기가 이룬 것에는 관계하지 않는 성령의 양식이다. 그런데 영적 무지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양식을 먹지 못해 썩은 냄새를 풍기는 무덤인 것을 모르고 자랑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란, 율법에서 은혜의 복음을 믿게 되어진 자요 돌비에서 심비로 바뀐 자요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들어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같은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에 합당한 자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요 네크로스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러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이다.
네크로스 죽음 상태에서 육체는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하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 다나토스 사망인 것을 깨닫고, 명분만 하나님께 두었을 뿐 실제로는 자기 명예, 명리만 챙기는 사망의 몸을 지닌 숙명적 죄인인 것을 확연히 깨닫고 나면 새 삶을 살게 된다.
육체는 본질상 제 안에 깃든 진노의 성향을 완전히 없애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혀 종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육체 너머에 걸린 사랑과 아름다움, 무지개 꿈을 추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보혜사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육체의 본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그를 통해서 성령께서 원하는 도구로써 우리의 육체를 선용할 때 네크로스 죽음 상태에서 우리는 살아난다.
이러한 삶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살아내신 예수님이시기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다나토스-선악과- 사망을 통과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고 하셨다. 생명과를 먹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는 과정을 먼저 겪어야 한다. 다만 우리들이 스스로 명리를 위해 선악과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지 헤아려 조심하면서 살려고 무진 애를 써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사망에 머물러 있도록 놓아두시지 않는다.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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