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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야기

가나의 혼인잔치 (요2) - 박승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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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의 혼인잔치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2;1-11)

세상 혼인 잔치를 통해서 종교의 혼인 잔치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를 할 때 물 항아리가 있는데 잔치에 참여하기 전에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귀한 지역이므로 위생을 위해서 발전되고 고착화된 혼인집 풍습이며 종교 예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대하여 생긴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어떤 랍비가 잠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손 씻을 물이 없이 먹는 물만 나오게 되자 먹지는 않고 손만 씻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풍습은 생활의 가벼움을 방지하고 엄숙함을 주겠으나 지나치면 오히려 종교 형식에 매이게 하는 역기능을 하게 된다.

잔치에는 술의 흥겨움이 있다.  


 여기에서의 잔치는 종교를 의미하며 종교(宗敎)란 글자 그대로 최고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최고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므로 생명 그것도 육체적 생명이 아닌 영혼의 생명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종교의 예법은 잘못하면 장엄함과 엄숙함에만 빠질 수도 있으나 예수님은 “내 종교는 흥겨움이다 내 종교는 무겁지 않다. 형식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잔치에 참석했으나 술이 없는 잔치집은 흥겨움이 없다. 예수 이전의 종교는 술이 없는 즉, 기쁨이 없는 종교로써 근본적으로 삶의 활력이 없는 죽은 종교와 같다. 종교는 내세를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내세만을 위한 종교는 바람직하지 않다. 내세를 현세로 끌어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을 “내세의 (내게 와지는 영생의 능력의 말씀) 능력의 말씀을 맛보고” (히6:5)라고 하였다.

종교는 현실을 희생하는 내세주의여서는 아니 될 것이며, 내세가 무시되는 이생 위주의 탐물주의로 빠져서는 더욱 안된다. 내세와 연관된 현실주의, 이생 최선주의여야 한다. 내세를 맛보아 알면 이생이 무겁지 않고 기쁘다. 그렇다고 경박한 가벼움은 아니다. 무엇에든지 최선의 삶을 살면서 초연할 수 있다. 이생은 내세와 연관해서 보면 하룻밤 꿈과 같다. 꿈꾸는 자가 꿈인걸 알고 꾸면 꿈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초연할 수 있듯이 내세를 맛보아 아는 이생의 삶은 기쁨이 동반된다.

예수의 종교는 술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나타낸 첫 번째 표적이다. 그것은 종교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쁨이 커져야 하는 것임을 말씀해주는 사건이다. 당시 유대 종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술은 떨어지고 물만 있었지만 예수의 종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술맛이 더욱 좋아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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