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3:9-12)
예수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시자 니고데모는 이해하기 어렵다. 거듭남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 일이기 때문이다. 땅의 일은 육신의 가시적 관찰이 가능한 것이지만 하늘 일은 육신의 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불가시적 일이므로 땅의 생각을 가진 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6-17) 하였으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하였다.
예수님은 육으로 태어났지만 육만을 위한 삶을 떠나서 영혼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탄생을 거듭남이라고 하였는데 사람의 육신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육신의 일만을 위해 생각하고 사는 자는 성경에서 사망의 존재라 한다. 그러나 육신으로 태어나 육신을 지켜보고 그 이상의 삶을 육신을 통해 살게 하는 ‘영’의 생각의 결과는 생명과 평안과 영생의 존재라 한다. (롬8:5-6 참조)
그러므로 거듭나라는 것은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육신의 정욕만을 위한 사망의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고 남 보기에는 부족할 수 있으나 자신의 역량의 한계내에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존재로 거듭나라” 말씀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요5:24)고 표현하신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4)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는 육신으로는 각자 가문의 혈통으로 육체적으로 태어났지만 영으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이다. 그는 세상 어느 누구나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의 이야기를 땅의 개념, 세상개념으로만 이해하려면 성경을 왜곡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율법은 사랑의 기초요 시작이다. 거듭남과 부활의 관계도 연결해서 살펴보면 거듭남은 부활의 시작이요, 부활은 거듭나아진 후에 무럭무럭 자라서 장성한 것이다. 즉, 부활은 거듭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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