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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야기

아는 것을 예비하라 (요4) - 박승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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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예비하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19-24)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세상에서나 종교에서나 관습이 나쁘지는 않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을 통해 배우고 익혀서 후손에게 계승 발전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관습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귀중히 여기고 섬기면서 영적 성장을 위해 활용을 하면 좋다. 그러나 관습의 종으로서 관습에 매이고 때로는 관습을 악용하여 신앙인들에게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강요한다면 문제가 있다.

율법의 문제 또한 그러한 것인데 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그 폐단을 말하기를 “우리가 율법은 신령(영적인 것)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롬7:14-)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말을 쉽게 풀이하면 “율법이란 원래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은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자신의 의지로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킬 수 없음을 인식 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관습은 선한 것이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좋은 관습을 악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관습의 노예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써 자동차는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타지는 않고 닦고 보관만 한다면 어리석은 것과 같다. 물론 타기만 하고 차를 소홀하게 관리하면 차의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 말을 믿으라”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였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앎의 예배이어야 한다.

아는 것을 예배하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배는 종교의 대상이 되는 분을 향하여 한없는 외경심을 바치는 종교의례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도 이러한 관습적 예배 의식의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한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하였다.

이 말은 진정한 예배는 어떤 대상에 대한 외경심만을 위한 종교의 행사가 아니라 “아는 것을 예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προσκυνεω; 프로스퀴네오)는 주인의 손을 개가 핥듯이 -입맞추는, 존경하는, 귀히 여기는- 뜻이 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그 알게 되어진 하나님의 뜻을 개가 주인의 손을 핥듯이 소중히 여기며 삶에서 드러날 수 있기를 원하는 강렬한 소망의 기도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알지 못하면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4:1~)라 표현하였다, 또한“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였다. 제사 즉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진정 예배드릴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허물을 들추자 예수님께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말씀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웠으면 배운 것이 자신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움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으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게 하실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우자. 하나님을 알기에 힘을 쏟자. 그래야 진정한 예배,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는 것이다” (눅11:40)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빌1:6)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존재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6:14) 하였다. 원어성경 히브리어를 보면 존재 동사의 미완료형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을 한글로 풀어 보면 하나님은 ‘계속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원하자 이름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신 것인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자신의 정체성이 그 이름으로 인하여 제한 받는 것이기에 이름 없는 존재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출6:3)라고 정해서 일러주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개인의 인지 능력 성장 단계에 맞추어 자신을 드러내는 살아 움직이는 진행형의 존재”로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요한복음 4장에서는 ‘영’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7)고 표현하였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 4:16절)라고 하면서 ‘보이지 않되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영으로 존재하시는 주와 합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영적 존재자가 될 수 없다. 요한일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말씀의 존재이며, 영으로 존재하시고 사랑으로 표현되신다. 하나님의 실존은 영인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 자신과 연합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과 사랑으로 접근하신다. 말씀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리지 아니하시면 인간은 그릇된 영적 존재와 합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말씀의 결과가 사랑의 심정을 갖게 하지 아니하면 말씀은 사단의 도구 역할을 할뿐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진정한 하나님의 심정인 사랑을 갖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합한 영적 존재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 진리의 영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라고 기록하였다. (요일4:1~참고) 결론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져서 육체를 통해 성령의 뜻이 드러나게 될 때에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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