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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하리라 (마10)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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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27-33)

시인한다는 것이 막연히 어떤 대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시인한 대상의 상태와 같게 되고 그렇게 살게 되었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부인한다는 것도 막연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이야기가 자신의 사유(思惟)와 너무 달라서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부인한다면, 부인을 당하는 자는 노엽기보다 단지 안타깝고 긍휼히 느낄 뿐이다. 이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다"(행17:30)라고 한다.

본문의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옳다고 인정한 그런 삶을 살기에는 고단하고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그 옳은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을 가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때 해당되는 말이다. 알지 못하는 자의 부인은 부인이랄 수도 없다. 세상에서는 알지 못하는 자의 부인도 부인이라고 하지만, 진리의 세계에서 알지 못하는 자의 부인은 부인이 아니다. 또 알지 못하는 자의 시인도 시인이 아니다. 성경은 어떤 일을 행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행하는 것을 경계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라고 했다.

알지 못하고 행하면 상대에게 무례히 행한 몹쓸 결과만 안겨줄 수 있으므로 폭 넓고 깊은 사고(思考)를 먼저 해봐야 한다.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신상의 작은 편안함(편안하다고 해봤자 자신이 진리의 길이라 인식했던 길을 걸어갔을 때와 비교해서 아주 편안한 것도 아니다)을 위해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진리의 소리에 의도적으로 귀를 막고 살았던 삶은 배반의 삶이다. 결국에는 자신의 그런 삶을 스스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슬픈 비가(悲歌)밖에 남는 게 없다.

이와는 반대로 육신의 삶은 고달팠어도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있는 삶, 그것을 바울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삶을……"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스스로 나 자신의 '기준 없는 기준'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타인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의 달란트만큼 자기 역량만큼 살았으면 된다. 그릇의 크기가 다른데 똑같은 양의 물을 담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가 어리석은 것이다.

또 같은 양의 물을 담으려고 애쓰는 자가 우매한 것이다. 꽃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꽃을 따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또 유실수가 꽃의 화려함과 향기를 부러워하여 과일을 맺지 않으려 한다면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꽃나무도 열매는 내겠지만 오로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며, 유실수도 꽃을 피우겠지만 꽃만 피우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다 제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다만 아는 만큼은 행하는 것이 믿음이고, 내게는 그 믿음만큼이 진리이다. 이와 반대로 아는 만큼 행하지 못한 삶은 부인이고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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