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자는 얻고 얻고자 하는 자는 잃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9:32-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자는 그것(지혜)을 얻는다"(시락의 집회서 51:26)
목숨을 얻는 자와 잃는 자
예수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하시면서 겉사람의 '몸의 목숨'과 속사람의 '영혼의 목숨'을 나누어 설명하신다. 세상의 모든 짐승과 미물들은 본능적으로 몸의 목숨을 위해 산다. 그러나 인간만은 몸의 목숨을 위해 사는 육체적 본능 이상의 삶을 원한다. 몸의 목숨을 통해 영혼의 목숨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선물 받았다.
그것을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고 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받은 은혜를 소홀히 하면 받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인간은 짐승보다 많은 은혜를 받았기에 짐승들과 다른 삶을 살지 못하면 그것들과 같거나 더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몸은 생로병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인간의 몸은 죽기 위해 태어났다. 성서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19-21)
혹은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전4:2-3)거나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5:7)라고까지 표현해 놓았다.
또한 성경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6-1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몸의 목숨을 위해 애쓰는 것은 없어질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리하면 몸의 목숨을 통해 얻어야 할 진정한 영혼의 목숨을 놓치게 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듯이 진리와 생명의 삶을 얻고 싶다면 몸의 목숨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전체적인 우주 만물의 윤곽은 창세기부터 알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고귀하신 뜻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속성)'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안에 있을 때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모양'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양'이란 속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과 모양이 드러나는 대신 사람의 탐심이 드러나는 것이 에덴동산 이야기에 있다. 에덴동산 중앙의 열매를 먹어서 자기 기준의 선, 자기 기준의 악을 규정하게 된 것이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자기 기준의 선악을 지혜로 여긴다. 우리는 첫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몸으로는 여전히 살았지만 영으로는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그에 반해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타인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 같으나 영으로는 진정한 생명에 이르렀다. 자기 목숨을 위해 애쓰며 보이는 육체만을 위한 썩어질 것의 삶을 산 첫 아담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나고 사망 가운데서 살았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을 위해서 육의 몸으로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생명의 씨를 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삶을 사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육으로는 본능적인 첫 아담의 기질이 있지만, 첫 아담의 그 본능대로 살지 않아야 한다.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둘째 아담의 살려주는 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아담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선악에 매인 사망 혹은 선악에 매이지 않는 영생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5-48)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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