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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바리새인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 (마11)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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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8-19)

 

먹고 마시지 않는 요한의 신앙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던 자이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세상 죄(사망)를 죽이는 것으로서 사망이 사망 당하게 하는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한은 기쁨의 결과를 위해 먼저 슬퍼하는 장례식이 있어야 했기에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요한의 준비하던 기쁨을 향한 슬픈 장례식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비웃는다.

먹고 마시는 예수의 신앙
세례요한이 장례식을 위해 애곡(哀哭, 소리 내어 슬피 울다)하는 회개를 선포하는데도 가슴을 치지 않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예수가 요한과 달리 먹고 마시기를 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혼인식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그들은 기쁨의 춤을 추지 않는다.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기준의 신앙생활과 다르다고 해서 세례요한은 귀신이 들린 것이고 예수는 먹기를 탐한다고 단정해서 말했다.

우리의 신앙생활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신앙의 모습이다. 현대인들도 신앙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바리새인처럼 자기 기준을 잣대로 상대평가를 한다. 인간은 절대 선을 추구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의 상대적 선악의 기준에 얽매여 살아간다. 자기 자신이 곧 악이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하기 싫기 때문에 상대를 악이라 단정하고 몰아붙인다. 그래야 자신이 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선은 무엇인가? 절대적 선이란 종교적 용어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막연하다. 하나님, 절대선이라는 것을 부정법을 사용하여 접근해 보자. 절대선이라는 것은 상대적 악을 갖고 있지 않은 선이다. 그렇다고 절대 악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절대선이란 선과 악을 나누지도 않고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상대적 선은 상대의 악한 무엇이나 부족한 것, 모난 것, 나쁜 것을 공격하고 죽이는 일을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자기가 죽인 악과 함께 공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절대적 선은 상대의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절대적 선 자신이 보완해야 할 또 다른 모습으로 본다. 창세기에 나오는 비유로, 아담과 하와의 결혼 당시 이들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 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은 상대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돕는 배필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 없이 자신에게 넘쳐서 남는 것을 상대에게 주고 또한 그렇게 상대가 내주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자이다. 부부 간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또한 돕는 배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요구하거나 무례히 행치 않고 타인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참신앙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타인과 비교하는 법이 없다. 또한 신앙의 기준이 자기나 자기 집단에 있지 않다. 타인을 보면서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돌아보고 타산지석(他山之石 :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다. 만약 타인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를 원하면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지적해 줄 필요는 있다.

그러나 타인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타인의 허물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악을 이기기 위해 선을 버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르는 방종(放縱)과 방임(放任)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스테반이나 빌립 집사처럼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내 도움을 필요로 한 자가 누구인지 깨어 지켜봐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남을 평가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돌아보고 도움을 바라는 자를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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