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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이야기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21)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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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1-9)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 예수
예수는 공생애의 마지막 길에 말 대신에 나귀를 타기로 작정하시고(슥9:9-10 참조) 준비하도록 하신다. 하나님과 세상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그릇된 의식의 존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상태에서 세상의 악한 영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릇된 신앙의 파수대, 성(城)의 역할을 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마지막 승리를 거둘 곳으로 정하시고 거기로 진군하셨다. 세상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들은 근사한 말을 타고 성으로 입성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멍에를 매는 짐승인 나귀를 타셨다. 그분은 자신이 평강과 구원을 주고 용서의 복음을 전달하는 은혜의 일꾼이자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귀를 타신 것이다.

예수님도 초기 사역에는 말(?)을 타셨다. 물론 군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평화를 통한 안식을 주기 위해 오만과 편견에 쌓인 사람들을 상대로 불가피하게 전쟁을 선포하고 치르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39)고 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삼 년 간 전쟁을 치르신 다음, 마지막으로 치를 전쟁도 결코 이기고 군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멍에 매는 나귀를 통해 드러내셨다. 악한 자들을 '악'이 아니라 '성령'으로써 이겨야 하는 전쟁을 마지막으로 치르시려고 나귀에 올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다. 그 나귀 주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 믿음을 예수께서 아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을 내세워 타인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심이 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물질적인 요구를 받으면 우선 뒤로 물러서서 심사숙고한다. 그런데 본문의 나귀 주인은 즉시 나귀를 내놓는다. 참다운 신앙의 결단은 생각하고 고심한 끝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즉시 이루어진다. 참다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무례하고 무리하게 빼앗는 분이 아니다. 아껴도 남음이 없고 후히 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 줄 안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에 대한 예물에 인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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