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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풀이

영생이란 - 정광교회 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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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영생이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17:3)

 

성경에서는 불교나 유교와 달리 구원과 영생의 길이 오직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종교인이나 소위 상식을 갖췄다는 사람들이 기독교는 편협하다고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제 신앙의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신앙을 타인에게 주장하고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유교나 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바도 사람답게 자비와 덕으로 홍익인간의 삶을 살자는 것에는 예외가 없는 때문이다.

성경은 착하고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덕적 삶의 결과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받고 영생 얻은 자가 그 은혜에 감사해서 타인에게도 그러한 은혜를 전하고자 전도하는 수고를 하는 것이며, 전도를 하는 데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도덕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권선징악의 개념을 대체로 수긍하며, 실제로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보고 겪으면서 사후의 세계에서라도 권선징악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염원을 갖곤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권선징악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선이므로 이를 권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악이니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성경 욥기에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욥’이란 인물은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흠결이 없는 자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대단한 열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울도 스스로 말하기를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6)고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제 신앙 때문에 다른 종교인을 죽이고 때리는 일을 일삼던 전형적인 광신도였다. 그래서 훗날 “내가 증거 하노니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고백하였다.

하나님도 욥을 두고 세상적 기준으로 봤을 때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하셨다. 그는 아들들이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었을지 모른다고 잔칫날 뒤에 그들 각자를 들어 번제를 드렸던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사단이 그의 소유물을 치면 욥이 주를 욕하리이다 하고 하느님께 말했다. 그러자 당신께서는 그의 목숨에만 손대지 말고 소유물은 네 손에 붙이노라 하셨던 것이다.

그 이후 욥의 고난이 시작된다. 소유물을 빼앗기고 종들과 자녀들이 죽게 된 지경에서도 그는 고백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욥1:21-22). 욥은 더 심한 고난도 받게 된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해도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다”(욥2:7-10)를 보라.

그러나 그 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로부터 칠일 밤낮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위로를 받고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3:1)는 상황이 벌어진다. 4장~12장까지 욥의 신앙과 삶에 대한 친구들의 그릇된 공격, 그리고 욥 자신의 불평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다가 자신을 책망하는 친구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등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슷한 연약성을 보인다. 그러고 난 후 13장에서는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줄 아노라…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13:3-23)라고 말한다. 이렇듯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강변한 뒤 이어 14장에서 30장까지 친구들의 그릇된 책망과 그에 대한 변명과 자신의 의를 강변하는 모습이 계속된다. 욥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31장에서는 욥이 다시 한 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욥31:1-6)고 말한다. 자신은 의로운데도 이런 일이 생긴 것은 하나님이 제대로 감찰하지 않으신 것 아니냐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복을 주실 거라고 굳게 믿는 신앙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욥에게 38장에서 41장에 이르기까지 줄곧 물으신다. 내가 우주 만물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너는 바닷물이 어느 경계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하며 이러저러한 우주 만물의 이치를 아느냐?

구원은, 세상의 길흉화복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게 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욥처럼 세상적으로 의로운 신앙의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구원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의로운 신앙이나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자인 것을 아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제 안의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하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욥은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욥42:3-6)라고 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35:5-8)는 말씀을 보라. 자신의 ‘의’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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