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돌린다
“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계4:9)
생물들, 즉 복음의 존재들은 영광과 존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린다고 한다. 바울의 표현을 빌어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고 했다.
여기서 강림은 파루시아(παρουσια )인데, ‘comeback’보다는 ‘appear’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1:15-16)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육체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핵심이다. 자기 달란트만큼 살아내기를 소망한 바로 이 사람들이 육체를 통한 삶이 변화하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또 하나님 은혜 가운데 당신의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나타나 점차 커지면서 그리스도 이전의 사망의 존재, 육신에 얽매인 자신을 존재 의미를 일깨우신 그리스도 그분에게 위임하게 됨을 기뻐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육체를 벗고 셋째하늘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에게 영광과 존귀, 감사와 위로를 돌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바울,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살 수 없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이 싫어서 살지 않는 것이다. 우주 속에 지구라는 별에 육체를 입고서 사람의 삶을 살기 위한 영혼 여행을 왔는데도 세상에 파묻혀 살다 보니 스스로 영적 존재라는 것, 왜 육체를 입었는지 그 까닭을 망각한 채 육체만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입으며 한평생 살아간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육체적 삶의 의미가 영적 사랑을 살아내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사는 존재는 구원받은 영혼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소마(σωμα)는 사르크스(σαρζ)에 비해 영의 소리에 순치된 몸을 가리킨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고 했다. 또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고도 했다.
세상에서 사랑이 있는 삶이란 육체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영혼이 있는 육체의 삶을 말한다. 영혼이 없는 육체의 삶은 이미 죽었으되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것뿐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육체를 지니고 있는 동안 영혼이 구원된 사랑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 위로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세계의 아름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설혹 자랑스러울 만큼 살아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라도 간절했다면 그는 천상 세계의 일원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사랑의 참모습 존재)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육체를 통해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훈련시키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육체가 말씀을 기억하여 생기는 현상) 됨이니…”(롬5:2-5)를 기억하자.
'요한계시록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 (계5) - 박승현 목사님 (0) | 2017.03.18 |
---|---|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놓는 이십사 장로 (계4) - 박승현 목사님 (0) | 2017.03.18 |
네 생물의 날개 (계4) - 박승현 목사님 (0) | 2017.03.18 |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계4) - 박승현 목사님 (0) | 2017.03.18 |
일곱 등불과 일곱 영 (계4) - 박승현 목사님 (0) | 2017.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