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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야기

태초(εν αρχη)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 - 박승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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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εν αρχη)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태초(αρχη)”는 일반적․철학적 의미의 시간개념으로 볼 때 새로운 시작의 기점을 나타낸다.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는 신앙적 진술에 있어서 시간적 순서의 상대성이 이 단어에 암시되어 있다. 철학에서 처음 이 단어를 쓸 때는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생성된 원래의 질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후에 모든 생성, 발전을 지배하는 기본법칙에 관련되어 쓰이게 됐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은 하나님과 물질(하나님이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을 아르카이(αρχαι)로 보았으며, 하나님은 로고스(λογος - 말씀, 정신)와 누스(νους - 지성, 마음)이며 아르케(αρχη)와 텔로스(τελος - 끝, 목적)로 보았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표현으로는 특히 ‘말씀(존재)’에 대해 적용시킬 수 있다. ‘말씀(존재)’은 시간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시간적인 측면으로 진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에 따라 시간적인 개념으로 쓰인 곳도 분명히 있다. 또한 아르케는 권력, 권세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여기 요한복음 1장 1절의 아르케를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귀절부터 이해해야 한다. 천지창조가 태초(요한 1장 1절을 참고로 하면,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다)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무형의 아르케에서 유형의 천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르케라는 단어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지만, 보이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케를 동양의 언어로 바꾸어 설명하면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로 설명할 수 있다. 태역(太易)은 아직 기(氣)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은 때이며, 태초(太初)는 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 태시(太始)는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를 말한다. 또한 태소(太素)는 질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를 이른다. 이렇듯 태역, 태초, 태시, 태소라는 의미의 아르케(히;תישׁאר 레쉬트)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에 나타난다.


구약에서 ‘창조’라는 단어는 세 종류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로 사용된 단어 ‘바라-ארב’는 무(無)에서 유(有)를 이루는 창조행위를 가리킨다.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 특수한 목적으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거나 만드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둘째, ‘아사-השׁע’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 나은 것을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창1:16,25,26 참조). 셋째, ‘야차르-רצי’는 ‘아사’와 비슷하지만 특별한 목적에 따라 원래 있던 사물을 새로이 완벽하게 조성하는 것을 가리킨다(창2:7,9 참조). 이 태초(아르케, 레쉬트)라는 단어에서 창조된 것들은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에서 보듯이 기운과 형상, 성질이 갖추어져 서로 떠날 수 없기 때문에 ‘혼돈’이라고 일렀다.

수면은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을 뜻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러야 할 당신의 모든 백성을 말한다. 운행은 ‘알을 품다’는 뜻인데, 우주 안팎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혼돈은 만물이 혼합되어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따라가도 붙잡을 수 없으므로 이를 ‘태역’이라 할 수 있다. 태역은 본래 형상과 사물의 징조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태역이 변화하여 하나의 기운이 되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7)고 했다. 여기서 생령은 육체를 가진 혼적 존재를 말한다.

말씀의 존재
태초에 말씀의 존재가 계시고 이 말씀의 존재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한다. 태초(εν αρχη)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을 말한다. 말씀의 존재는 실제 영으로 존재하지만 육의 사람을 위해 영적 존재인 자신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다. 이 말씀의 존재를 하나님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기 말씀 존재의 하나님과는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6-27 참조)가 그것이다. “우리”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말씀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함께 계셨고, 만물이 말씀의 존재인 하나님으로 인해 지은 바 되었으며, 그(말씀의 존재)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에 언급한 것을 표현만 달리해서 다시 말씀하신 것으로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를 생각해보자. 어떤 한 분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과 연결해서 보면  어떤 하나님은 태초를 통해서 자신을 물질화시키지 않고 계시지만 말씀의 존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과 긴밀한 협조 속에 (창1:26) 자신이 태초를 통해서 물질화 되어지는 창조물 속에 담기기 시작했음을 표현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Christ is all, and in all” (골3:11) 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하나님은 곧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만물의 겉과 속에 계시고 만물 중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만물 중에 하나인 인간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말씀의 존재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바울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갈1:16)로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사람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이나 골로새서를 보면 어떤 하나님, 말씀의 존재인 그리스도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 하나님이 나타나지는, 즉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내가 연합된 ‘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육신으로는 누구 누구의 자손이라는 혈통에서 나왔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기 위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즉 태초로부터 그 영의 씨가 육체에 심어져 태어나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 : 15-17)


빛과 어두움    
성경에서는 빛을 생명이라 하고 어두움을 사망이라 하는데 육신의 생명과 사망을 말함이 아니고 영혼의 생명과 사망을 가리킨다. 영혼이 사망의 상태에 있는 자는 자칭 구원 받은 자라 여기고 자기 기준의 신앙의 잣대로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안전하다 여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지라” (살전5:3-6)는 말을 통해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과 빛에 속한 자들을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빛은 진리를 말하고 생명을 말하며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게 한다. 겉사람 보다 속사람의 새로워짐(속사람의 발굴)을 위해 비추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두움은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혹시 관심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바탕으로 한 천국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천국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 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바탕으로 욕심 천국이 존재하므로 진정한 의미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빛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한다. 자기 욕심에 맞는 소리는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12)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잘못 읽으면 처음부터 외인은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구원에서 제외시키겠다는 편협한 하나님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듣는 자들에게 알기 쉽도록 비유로 설명을 해주어도- 듣는 자가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도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요14:16-17)고 말씀하셨다. 어두움에 속한 세상 사람의 목적은 욕심의 이루어짐이지 욕심을 내쫓는 것이 아니므로 우선적으로 욕심을 깨닫게 하고 욕심을 내쫓게 하는 빛의 비추임을 통해서 자신이 어두움의 상태에 있는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예수님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3-45)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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