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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야기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요1) - 박승현 목사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다르게 표현하면 영접하는 자는 영접 받는 자를 말한다-
  
세상에서도 영접(대접) 할 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빛 된 존재를 영접(대접)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며 영접(대접)하려는 자는 영접(대접) 받는 자의 의도대로 영접(대접) 해야 한다. 세상에서는 영접 받는 자의 의도 이상으로 영접 할 수 있겠지만 신앙 세계에서는 영접 받는 자의 의도 이상으로는 영접할 수 없는데 영접 받는 자의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고의 영접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 영접 받는 자의 의도는 자신의 생명 된 빛을 영접 하는 자가 받아 들여서 그 자신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다. 즉 영접 하는 자가 삶을 스스로 속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지 영접 받는 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영접 받는 자는 영접 하는 자가 영접 받는 자처럼 생명의 빛을 자기 안에 소유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1-12)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든지 너희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성령의 열매적 삶을 자신의 주변 사람이 받아들여 (영접해서) 자신처럼 살게 되어지길 바랄 뿐이다. 바울은 자기를 재판하도록 로마에서 파송된 베스도 유대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행26:24-29참조)고 하였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이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구하기만 한다고 영접할 수는 없다. 구하고 찾기만 한다고 영접할 수도 없다. 구하고 찾은 다음 두드려야만 영접할 수 있다. 구하는 자가 있으나 정작 찾는 이가 적고 찾은 자가 더러 있으나 두드리는 자가 없다. 또한 있었다고 하나 천국 문의 문고리를 모르기 때문에 두드리다 지쳐 버린다. 

마태복음 7장 9절 이후 말씀에서는 우리가 두드리면 그 분이 열어주시는데 그 분이 열어주셔도 우리 쪽에서 그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하신다. 우리가 그 분을 향하여 두드리듯 그분도 우리를 향하여 두드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고 하셨다. 그 분은 열어주셨는데 우리 자신이 그 분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접한 자의 권세
영접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사람의 노력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될 때에 가능하다. 말씀을 똑같이 들으나 듣는 자의 마음가짐과 전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과 맞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다. 그래서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는 못했다. 바리새인들의 말씀이 옳은데도 그들은 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수 없었는가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말씀이 피와 살 같은 말씀일 때라야 성령이고 진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와 살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피와 살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하는 말도 말은 옳게 들려진다. 그러나 그 옳은 말이 무엇을 위해 옳은 것인가가 문제이다. 자기를 높이기 위한 수단과 상대방을 부리기 위한 수단으로 옳은 말을 하는 것은 피와 살이 없는 말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상대에게도 시키지 말라’ 는 격언이 있듯이 성경은 단호하게 말하기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한편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는데 먹은 자는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 먹되 일하지 아니하는 자는 게으른 자요, 게으른 자를 죄 없다 아니 하신다고 하셨다.
인자의 피를 마시고 인자의 살을 먹었다면 인자처럼 인자의 남은 육체의 고난을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워야 할 것이다 (골1:24참조). 이렇듯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삶을 산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권세를 누린다.

그 권세 중에 첫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권세이다. 비천에 처하되 비굴하지 않고 풍부에 처하되 교만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어떠한 여건에서도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다. 둘째는,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구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권세이다. 선한 자에게는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하는 사랑을 하게 되며 (마6:45 이후 참조) 악한 자도 긍휼이 여기며 그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처럼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엿봐야 한다 (히13:17참조).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으로 낳는 권세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는데 아비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의 자녀를 낳아야 한다. 신앙 세계는 결국 자기 같은 존재를 낳는 것인데 세상에서도 자기 같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천국과 지옥은 믿음에 의한 삶의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피와 살로써 선한 자녀를 낳았다면 생명의 부활로 낳은 것이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피와 살이 없이 자녀를 낳았으면 심판의 부활로 낳은 것이다.